서울의 대표 복합 문화공간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그 아래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이 사람들과 이곳을 연결해 줍니다.
이 역의 옛 이름은 서울운동장역과 동대문운동장역 두 번이나 바뀐 역 이름을 되집다 이곳이 운동장이었음을 떠올립니다.
전차가 다니던 먼 옛날에도 이곳은 운동장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끌어안고 공원 안 작은 기념관 속으로 들어가 버린 기억 이곳은 언제부터 운동장이 있었을까요?
전국 체육대회가 100회를 맞았다고 합니다. 백 년 전 어느 곳 어느 운동장이 그 무대였을까 궁금해집니다.
1976년 여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돌아온 일흔두 명의 선수단.
하지만 환영 행사는 단 한 명을 위해 열린 행사와도 같았습니다.
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환영식장. 광장을 꽉 메운 시민들은 메달리스트들이 모습을 나타내자...
양정호의 올림픽 금메달 그것은 기쁨을 넘어 충격과도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정녕 처음으로 애국가가 몬트리올 하늘 아래 울려 퍼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우린 40년 전 또 한 명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를 떠올립니다.
우리 민족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하지만 그의 귀국은 양정모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미완의 금메달 한스러움에 머물러 있던 손기정에게 양정모의 금메달은 아주 특별한 감격이었겠죠.
나라를 잃은 혼란기에도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열정을 품고 운동장을 뛰었던 사람들.
그 올림픽을 향한 염원의 시작점은 어디일까요?
제 100회 전국체육대회를 맞아 발행된 기념주화. 그런데 이 기념주화는 모습이 좀 특이하죠.
일반적인 동전들과 달리 그 모양이 마른모입니다.
기념주화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서울 덕수궁 뒤편 배제학당 역사 박물관을 찾아가 봅니다.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었던 배제학당. 그곳에선 영어를 비롯해 역사, 지리, 정치 등 그동안 접하지 못한 새로운 교육이 이루어졌고, 그 중엔 체육이라는 낯선 분야도 포함되어 있었죠.
체육을 가르치고 학생들이 야구 축구를 즐기던 학교.
당연히 학교엔 운동장도 있었습니다.
1920년 11월 4일 배제보고 운동장에 휘문, 중앙 등 다른 학교 학생들은 물론 경신굴악부, 천도교, 청년회 등 청년들이 모여듭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야구 유니폼이군요.
운동장에 모인 모두 열 개 팀의 선수들 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조선인들의 통합 체육단체를 목표로 같은 해 7월 발족한 조선체육회의 첫 작품인 제 1회 전조선야구대회
체육계에선 이 대회를 전국 체육대회의 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100년 전 배제보고 운동장에서 야구로 시작한 전국 체육대회 기념주화가 마른모인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인 것이죠.
대회에 앞서 두루마기 차림으로 시구를 했던 이 사람은 바로 독립운동가 이상재.
이상재는 YMCA를 이끌며 체육 발전에 기여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이제 YMCA로 자리를 옮겨 볼까요? 정동 배제보고 운동장에서 동쪽으로 이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곳 지금도 YMCA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서울의 중심 종로2가입니다.
백 년 전 당시로서는 아주 훌륭한 시설을 갖춘 YMCA가 우리 근대 체육교육의 발상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건물 안에는 체육관이 있어 탁구를 비롯한 실내 운동이 가능했고 건물 뒤편엔 농구장도 있었다고 하네요.
영화로 보았던 YMCA의 야구단의 흔적은 사진 속 유니폼에서도 선명히 나타나는데요.
특히 우리나라에 처음 야구를 전한 것으로 알려진 선교사 질레트의 역할로 YMCA는 우리 근대 체육 발전에 큰 몫을 해냅니다.
야구, 축구, 농구, 권투, 육상은 물론 씨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목의 스포츠가 뿌리를 내리는 배경에 YMCA가 있었던 것이죠.
이번엔 서울 도성 밖으로 나가 봅니다. 배제보고 운동장 종로 YMCA와 함께 근대 체육 역사에 있어 중요한 장소 한 곳을 더 꼽자면 해암문밖, 삼선평을 들 수 있습니다.
서울 삼선동 동서문동 일대를 이루던 이곳은 북악산과 낙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입니다.
1896년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 운동회가 열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1906년 최초의 축구대회가 개최되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는 이곳.
이곳은 원래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으로 쓰이던 곳입니다.
지금은 빼곡히 크고 작은 건물이 들어차 있지만 평자가 들어간 지명에서도 나타나듯 아늑한 평지였기 때문에 훈련장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겠죠.
군사훈련장이 운동장으로 변모한 또 한 곳. 그곳은 바로 훈련원공원 주변입니다.
조선시대 군사 기관이던 훈련원 하도감이 있던 곳 그곳이 바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선 곳.
다시 말해 동대문 운동장이 있던 곳입니다. 지난 2007년 긴 논란 끝에 운동장이 철거되고 철거 과정에서 드러난 성곽이 복원되면서 이 일대가 이제 역사문화공원이 된 것인데요.
그렇다면 이곳에 운동장이 들어선 것은 언제일까요?
1925년 5월 당시 서울의 동쪽 끝 하도감 앞 동대문 자락의 성곽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운동장을 만들기 위해서였죠. 그렇게 해서 다섯 달의 공사가 이어지고 훈련원 동쪽 광희문과 동대문 사이 이만 이천 칠백 평에 총 수용 인원 이만 오천팔백 명에 당시로선 동양 최대 규모의 현대식 운동장 경성운동장이 완성된 것이죠.
경성운동장은 오백 미터 트랙의 육상 경기장과 그 필드에 축구장이 있었고, 야구장, 정구장에 다이빙대를 갖춘 수영장까지 당시로선 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복합 체육시설이었던 것입니다.
경성운동장 개장 기념 행사는 조선신궁경기대회 일본인들이 남산 자락에 건립한 그들의 종교적 성지 신궁을 홍보하는 성격의 체육대회였죠.
경성운동장은 일제에 의해 건립된 운동장이었던 것입니다.
조선신궁경기대회에 일본인들이 몰려들던 그때 서울의 서쪽 반대편 배제고부 운동장엔 또 다른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신궁대회에 맞서기 위해 조선체육회가 제 6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열어 일제에 항거하는 뜻을 드러냈던 것이죠.
일본인 중심의 체육 단체에 맞서기 위해 만들어진 조선체육회는 이렇게 전조선야구대회를 시작으로 탁구, 정구, 육상, 축구 등 다양한 종목에서 조선인들만의 체육대회를 열어 나갑니다.
특히 육상에선 인력거꾼처럼 다리를 많이 쓰는 사람의 참가를 제한하는 등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웃지 못할 규칙들이 등장했고, 평양, 정주, 동래 등 전국 각지의 선수단이 참가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전조선축구대회는 입장료가 야구 대회의 두 배인 20전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여성들의 체육활동, 체육 교육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요?
서울은 물론 평양, 공주, 개성, 전국 각지에 생겨난 여학교들은 여성의 운동 경기가 풍속을 해치는 일이라 비난받던 시대를 이겨내고 정구, 농구, 배구는 물론 야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목에서 여성들의 체육 활동이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특히 교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종 경기대회에 참가함으로써 여성 체육 활성화에 박차를 가하기도 하죠.
당시 우리 여성들의 체육 활동이 본격화되었음을 제대로 보여주는 행사가 바로 전조선여자정구대회입니다.
여성 체육에 대한 편견이 점차 사라지고 관심은 오히려 높아져 가고 있다는 현실이 신문을 통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스커트 차림으로 운동장을 누비는 정구 선수의 모습이 신문을 장식했고, 전조선여자정구대회가 열리면 신문은 특집 화보를 구성해 각 학교 참가 선수단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학교마다 다른 각양각색의 유니폼입니다.
여자정구대회가 개최될 만큼 종목별 대회가 활성화되자 조선체육회는 1929년부터 개별 종목별 대회를 통합해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개최합니다.
종합 체육대회의 면모를 갖추며 올림픽에 대한 염원을 더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죠.
흥미로운 점은 야구, 축구의 인기 못지않게 육상의 인기도 점점 올라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육상 인기의 정점엔 역시 마라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요.
그 여세를 몰아 1932년 미국 LA에서 열린 제10회 올림픽에 두 명의 마라토너가 출전하게 되고 미국의 동포들은 태극기를 걸고 이들을 환영합니다.
권태하, 김은배의 모교인 육상 명문 양정보고에는 맨발의 투혼을 불사르던 또 한 명의 조선인 마라토너가 있었습니다.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리 민족은 물론 일본 사람들까지 놀라게 했던 천재 마라토너 손기정.
그는 일본인들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독일 베를린에서 마라톤 우승의 영광을 거머쥐었던 것이죠.
민족의 염원이 이루어진 순간 하지만 손기정은 웃지 못했습니다.
올림픽 기간 내내 일장기가 달린 운동복을 입지 않고 스스로 조선인이라 이야기하고 다녔던 손기정.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아나운서는 그를 조선인이라 소개하기에 이릅니다.
민족의 염원이었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손기정의 금메달은 손기정 개인에게도 우리 체육계에도 큰 시련을 줍니다.
베를린 올림픽 이듬해 조선체육회는 해산되고 전조선경기대회도 중단되고 말지요.
물론 손기정도 운동장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조선체육회도 해체되고 손기정도 사라진 지 8년 일제가 경성운동장이라 이름 지었던 그곳은 서울운동장이라 이름이 바뀌고 태극기를 앞세운 행진이 벌어집니다.
그 감격적인 행사의 기수는 바로 손기정. 손기정은 태극기를 든 채 눈물을 이기지 못합니다.
2년 후엔 손기정을 잇는 마라톤 천재가 탄생합니다.
서윤복이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 월계관을 가져온 것입니다.
서윤복의 우승으로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참가하는 올림픽에 대한 바램을 더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서윤복 우승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YMCA를 떠난 운구 차량이 서울운동장을 향합니다.
런던 올림픽 후원권에 얼굴을 올린 그의 이름은 전경무 조선체육회 올림픽 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전경무의 장례식입니다.
스톡홀름 IOC 총회 참석을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그는 그만 사고로 목숨을 잃고 말죠.
하지만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게 이듬해 7월 런던 올림픽에 우리는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처음 참가하게 됩니다.
전경무의 장례식을 치른 서울운동장에선 1년 후 런던 올림픽 출정식이 열립니다.
최초로 우리 이름을 달고 출전하는 역사적인 올림픽이었죠.
1948년 7월 29일부터 8월 14일까지 영국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우리 선수들은 출정식을 마치고 런던으로 향합니다.
선수단은 기차, 배, 비행기, 탈 수 있는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해 18일 만에 런던에 도착하게 되지요.
그런데 짚어볼 점 한 가지. 올림픽이 열린 1948년 7월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 즉 정식 국가로 인정받기도 전에 어떻게 출전이 가능했을까요?
올림픽 참가 과정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사람은 재미교포 이원순입니다.
독립운동을 같이 했던 전경모와 함께 브런드지 IOC 부위원장을 만나 올림픽 참가를 추진했던 인물이죠.
전경무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원순은 그가 남긴 서류들을 전달받아 영국과 스톡홀름으로 방문합니다.
하지만 정부 수립 이전 그는 어떤 여권으로 비행기를 탔을까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스톡홀름에 도착해서도 정부가 없다는 점 국제경기연맹 가입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문제에 봉착합니다.
정부 수립 이전 올림픽 참가에 힘을 보탠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보스턴의 영웅 서윤복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부 수립 하루 전에 폐막된 그 올림픽에 우리는 출전했고 이원수는 단장이자 선수단의 일원으로 통역을 맡게 됩니다.
이원순이 사십칠년 아이오씨 총회에 참석 때 그랬듯이 선수단도 정식 여권이 아닌 여행증명서로 런던을 향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참가한 런던 올림픽 육상 투원반의 여고생 박봉식은 단연 화제의 선수였고 런던 올림픽 최고의 메달 기대주 서윤복, 최윤칠의 부진은 충격이었죠.
축구 대표팀은 멕시코를 누르는 이변을 연출했지만 메달은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 한수환의 몫이었습니다.
1951년 역사상 최초로 지방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립니다.
이유는 특별했습니다. 전쟁 중이었으니까요.
전란 중에도 대회를 이어간 이유 그것은 아마 올림픽에 닿아 있을 것입니다.
이듬해 우린 전쟁 중임에도 헬싱키올림픽에 참가합니다.
전쟁이 끝나자 전국체육대회도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체육대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가 되기 위해 변신을 하기 시작하죠.
그 변신엔 운동장의 변신도 포함됩니다. 지어진 지 30년이 된 서울운동장.
그 변화는 불에서 시작됩니다. 지난 2007년 82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사라진 운동장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곳.
흥미롭게도 그 남아있는 흔적 두 가지는 모두 운동장을 밝히는 불이였습니다.
운동장을 운동장답게 만들었던 두 가지 불. 자, 먼저 성아대부터 들여다 볼까요?
1955년 벌써 두 번이나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했던 경험은 전국 체육대회에 올림픽다운 면모를 심고자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성화를 도입한 것이죠.
서울운동장 가장 높은 곳에 성화대를 만들고 마치 그리스 신전에서 올림픽 성화를 채화하듯 강화도 마니산에서 채화한 성화를 모셔와 불을 옮겨 붙였던 것이죠.
국민의례가 끝나자 강화도에서 발화되어 60명의 봉정자에 의해서 미래식으로 운반된 성화가 도착 성화대에 점화됐습니다.
성화가 등장한 지 11년 만에 서울운동장에는 새로운 불이 켜집니다.
서울운동장에 성화라는 불이 등장하며 운동장으로서의 위상이 올라갔다면, 조명탑은 실제적인 경기장으로서의 자리를 잡은 서울운동장을 상징했습니다.
한여름 수영장 야간 경기를 위해 임시로 가설한 전구로 불을 밝힌 적은 있지만 제대로 된 조명탑이 건립된 것은 운동장이 개장된 지 4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야구장에 이어 2년 뒤 축구장에도 조명탑이 만들어지는데요.
당시 연이어 좋은 성적을 거둔 축구 선수들의 요청에 대통령 특별 지시로 건립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게 동대문에 조명탑이 올라가며 경기장의 사정이 좋아졌다면, 서울 동북쪽 불암산 자락엔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지가 만들어집니다.
태릉선수촌이 바로 그것이죠.
국민체육진흥법을 만들어 체육계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태릉선수촌을 중심으로 엘리트 체육인을 제도적으로 육성하던 시절, 태릉선수촌은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꿈꾸는 국가대표를 더 국가대표답게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정권은 체육시설 건립에도 투자를 집중합니다.
경기장의 변화는 전국체육대회에도 변화를 가져오는데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태릉국제수영장입니다. 실내수영장이 생김으로써 수영 종목만 여름에 따로 대회를 치르던 하계 대회를 추계대회 즉 전국체육대회의 본 대회 기간으로 통합할 수 있게 한 것이죠.
대부분의 종목들이 서울운동장과 그 주변에서 경기를 치르던 시절, 태릉국제수영장은 전문 경기장 시대를 여는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전국체육대회의 또 다른 변화 그것은 지역 간 경쟁에 열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상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민족의 제전 제52회 전국체육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막을 올렸습니다.
굳센 체력, 알찬 단결, 빛나는 전진을 다짐하면서 멀리 재일교포 선수단과 전국 11개 시도 선수단이 향토의 영예를 안고 입장했습니다.
수많은 학생들이 동원되어 경기장을 수놓은 매스게임은 전국 체육대회의 또 다른 볼거리였는데요.
특히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은 1967년부터 등장한 카드 섹션이었습니다.
매년 서울운동장 중앙 스탠들을 가득 메운 채 카드 섹션 판넬을 들고 있던 그들은 누구일까 궁금해집니다.
만 6507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한성여자고등학교가 처음으로 협동과 조화미를 바탕으로 시작한 카드 섹션은 48회 대회에서는 고작 26개 종목이었던 것이 55회 대회에서는 무려 257종의 카드 섹션이 펼쳐졌다.
당시 서울운동장 스탠드를 그대로 옮겨 놓은 구조물이 학교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한성여자중고등학교. 다른 학교 운동장의 스탠드와는 확연히 달라 보이죠. 당시엔 원망스럽기만 했을 그 스탠드 벌써 오십 년이 다 된 그 시절 추억은 어떠할지도 궁금합니다.
전국체육대회는 말 그대로 전국에서 모인 선수들의 스포츠 축제였습니다.
그 축제의 장은 서울운동장만이 아니었는데요. 대회가 열리면 먼저 서울역에서부터 전국에서 올라온 선수단으로 북적이는 모습이 연출되곤 했죠.
서울운동장 맞은편 숙박 시설 또한 술렁이긴 마찬가지였고, 마치 수학여행을 온 듯 어린 선수들로 가득 찬 모습들이 지금은 볼 수 없는 정겨운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서울운동장이 전국체육대회만의 무대는 아니었겠죠.
6,70대 최고의 인기 종목도 역시 축구와 야구, 국제축구대회나 고교야구대회가 열리면 운동장 앞엔 표를 사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서기 마련이었고, 표를 사지 못한 사람들은 암표 장사들에게 웃돈을 주고 표를 구하기도 했죠.
도망치는 암표 장사와 단속하는 경찰의 모습이 낯설지 않던 서울운동장 주변, 당시 스코츠의 중심지로서 서울운동장이 누리던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3만여 관중들의 열광의 함성으로 뒤흔든 서울운동장 야구장.
힘껏 때려 멋지게 이겨라 승리할 때까지 각기 고장에서 누구나 피었던 마음이다.
이겼다. 피와 땀의 대가는 헛되지 않는다는 실정을 보여주었다.
야구의 혁명을 일으킨 군산상...
대전광역시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한밭종합운동장.
이곳에 대규모 체육시설이 들어선 것은 대전이 충청남도 대전시였던 1960년이었습니다.
대전공설운동장이란 이름으로 제 41회 전국체육대회를 위한 운동장이 건립되었던 것이죠.
전국체육대회 지방 개최 시대를 알리는 상징물이자 지방 체육 발전을 위한 실제적인 디딤돌이 생겨난 것이었죠.
전국체육대회에는 서울운동장이란 등식이 깨지기 시작한 겁니다.
대전을 시작으로 지역마다 대규모 체육시설이 들어서고 1975년 대구 대회부터는 본격적인 전국체육대회 지방 개최가 시작됩니다.
전국체육대회의 지방 개최는 본격적인 지역 간 경쟁의 시대를 열었고, 지방 체육 발전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지방 문화 축제로서의 역할도 해냅니다.
선서 제 61회 전국체육대회 참가한 우리 선수 일동은 대회 규정을 준수하고 상토의 명예를 위하여 정정당당히 싸울 것을 선서합니다.
일천구백팔십년 10월 8일 선수 대표 강영식
1980년대에 들어서며 전국체육대회는 큰 변화를 맞습니다.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전국체육대회는 올림픽의 연습이 되었고 더 화려해진 것은 물론 국제적인 체육대회로서의 기준을 지향해 나갑니다.
1986년 지방을 순회하던 전국체육대회는 다시 서울에서 열립니다.
86년 아시안게임의 리허설과도 같은 대회였죠.
물론 그 무대는 동대문운동장이 아니라 잠실운동장이었습니다.
올림픽 전초전이라 여겼던 86년 아시안게임 잠실 운동장에선 두 명의 새로운 스타가 탄생합니다.
우리에게 취약 종목이었던 육상에서였습니다.
장재근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서포트하기 시작했습니다. 임춘애 왔습니다.
임춘애 약 60이 다 잡았습니다. 임치혁 임치회 금메달이 눈앞에 보입니다.
20미터 앞에 금메달 금메달이 임춘애 금메달 2관왕 육상 사상 처음으로 2관왕이 됐습니다.
장재근을 아시안게임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 주었던 잠실운동장.
30년이 지난 지금도 운동장은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운동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은 아시안게임 3관왕 임춘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 내린 흙바닥에서 경기를 치른 덕에 전국체육대회에서 행운을 얻었다는 장재근 임춘애 또한 전국체육대회가 만든 행운아이긴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삼천 미터와 천 오백 미터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우자 그녀는 선발전을 거치지 않고 아시안게임 대표로 출전했던 것이죠.
라면만 먹고 뛰었다는 매스컴의 과장이 그녀를 괴롭혔고, 운동 중 입은 부상은 임춘애를 트랙에서 내려오게 합니다.
몸과 마음이 지쳤지만 그녀가 다시 설 수 있게 붙잡아주는 곳이 없었던 것이죠.
서울 올림픽 이후 체계적 선수 관리가 만든 결과물 중 하나는 선수 생명 연장이었고, 그것은 전국 체육대회에도 새로운 기록으로 반영됩니다.
전국체육대회 10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장미란이 그렇고, 전국 체육대회에서 다섯 번의 MVP를 차지한 박태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전국체육대회를 통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 온 수많은 스타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경기장의 열기는 전국체육대회가 좀 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다리 역할도 하고 있겠죠.
세계선수권을 재패하고, 올림픽에서 우승을 이어가는 정상급 스포츠 스타들에게 이 전국체육대회는 어떤 느낌의 대회일까요?
그들에게도 전국체육대회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일 텐데 말입니다.
먼 나라에서 열리는 대회가 아니니 항상 가족의 응원을 받을 수 있어 좋다는 진종오 선수 올림픽 3연속 금메달 리스트의 감상은 의외로 소박했습니다.
그럼 배드민턴으로 세계를 재패했던 이용대 선수에게 전국체육대회란 무엇일까요?
제 100회 전국체육대회 체조경기가 열리고 있는 잠실실내체육관. 도마 여제라 불리며 지난해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냈던 여서정 선수가 힘차게 도약합니다.
여서정 선수에게 전국체육대회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앞으로가 한창일 어린 선수라는 이야기입니다.
매년 새로운 성장의 무대에 서는 어린 딸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전국체육대회 100년을 맞아 잠실운동장은 1986년 이후 33년 만에 전국체육대회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 서울엔 어떤 변화가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잠실운동장이 생기며 역할이 작아졌던 동대문운동장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개발의 시대, 동대문운동장의 조명탑과 함께 올라갔던 청계고가의 교각도 운동장의 조명탑처럼 흔적만 남기고 사람들에게 산책길을 내주었습니다.
80년 넘게 운동장으로 상징되던 그곳엔 운동장에 눌려 있던 성곽이 복원되고 복합 문화 공간이 생겼습니다.
이곳이 운동장이었노라 외치듯 서 있는 성화대.
올림픽의 상징, 손기정이 처음 점하였던 동대문의 성화대도 이제 그 역할을 잠실에 내주고 또 다른 100년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마치 손기정이 임춘애에게 성화의 불씨를 넘겼듯 말입니다.
우리의 존재감을 확인하기 위해 열렸던 그 야구대회가 이제 100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의 100년, 우리 미래에 또 새롭게 세워질 성화대는 어떤 곳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