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체육시설 웹예능
Ep2. 86아시안게임
김영성 기자와 서장훈 선수가 함께하는 [대한민국 스포츠와 함께해 온 서울시 체육시설]의 두번째 에피소드!
1986년 아시안게임, 서울에서 펼쳐진 역사적인 순간! 이 대회가 서울과 대한민국에 어떤 중요한 의미를 남겼는지 알아봅니다.
‘라면 소녀’ 임춘애, ‘아시아의 호랑이’ 최순호!
그들의 경기 영상, 금메달 순간,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당시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는 명경기 모음부터, 레전드 선수들의 근황 인터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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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스포츠와 함께해 온 서울시 체육시설의 두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1986년, 86 아시안게임의 뜨거운 열기를 되살려 보겠습니다 장훈씨는 그때 농구 선수 였나요? 86년도에는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인데 그때 야구를 하고 있었고요 농구를 이렇게 오래 했지만 86년 당시에는 제가 농구에 관심이 없었어요 86 아시안게임 농구는 제가 안 봤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 86 아시안게임 현장으로 함께 가보시죠 86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우리나라는 정말 열심히 준비를 했습니다 당시 방송에서는 '우리 겨레 재도약의 분기점' 이라는 (거창한) 표현도 사용했구요 이 대회에 성공하면 아시아의 리더 국가이자 지도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희망과 각오가 묻어났습니다 또 아시안게임을 잘 치러야 2년 뒤에 있을 88 서울올림픽에 대한 자신감도 생길 테니까요 아무래도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을) 했기 때문에 선수들도 더 홈그라운드라서 더 신이 나서 잘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우리나라 선수들이 굉장히 선전을 해서 금메달을 어마어마하게 땄던 기억이 있습니다 ‘와~우리나라에선 하는데 이렇게 많이 (메달을) 따도 되나?’ 이런 걱정도 좀 했던 기억이 있어요 홈그라운드의 이점이라는 게 또 있지 않습니까 ‘홈그라운드 이점’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경기 2002 부산아시안게임 농구 결승이 생각나는데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잊을 수 없는 영원히 기록될 명승부 아니겠습니까? 그때 서장훈 선수도 뛰었고 현장에서 저도 스포츠 농구 기자로 취재를 했었는데 모두가 울었어요 그 당시 제가 대표팀 선수로 약 13년 정도 뛰었는데 제가 국가대표가 된 뒤에 한번도 중국을 중요한 대회에서 이기지 못했었는데 그때는 우리 홈그라운드였고 부산에서 많은 관중분들께서 응원해 주신 덕분에 좀 더 힘을 내서 마지막까지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또 (중국 대표팀을) 따라붙어서 결국 저희가 이겼는데 정말 감동적이었고 많은 분들의 간절한 바람이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어요) 홈에서 응원을 받으면서 대회를 치른다는 게 정말 큰 이점인데요 그래서 그런지 86 아시안게임에서도 놀라운 기록들이 탄생합니다 먼저 86 아시안게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임춘애 선수죠. ‘라면 소녀'라는 별명도 그때 있었죠 육상에서 한국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경우를 자주 못 봤는데, (아시안게임에서) 여러 개를 따시니까 정말 놀라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800m우승 후)1500, 3000m 정말 잘 뛰어야 된다고 근데 저희가 그 당시 중국하고 (기록이) 10초 이상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금메달 생각도 안하고 뛰었는데 제가 이상하게 10초 이상 잘 뛰어버리고 중국, 일본 선수들이 컨디션이 안 좋았는지 자기 기록보다 못 뛰고 저는 운이 좋은 선수죠 여자 육상에는 임춘애가 있었다면 남자 육상에는 장재근 선수도 있었습니다 200m와 400m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대한민국 단거리 육상의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이번에는 수영장으로 갑니다 이때 수영 2관왕에 오른 선수가 있는데 아시아의 인어, 누군지 아시죠? 최윤희 선수 (모두가) 다 알죠 저 당시에 제가 꼬맹이가 아니었고 학생이었기 때문에 다 기억이 납니다 사실은 최윤희 선수가 82년 뉴델리에서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했어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는 배영 100m와 200m 2관왕을 했으니까 박태환 선수 이전에 한국 수영의 원조 스타였죠 대한민국 수영의 레전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대회 마지막 날, 축구 결승전이 열렸습니다 대한민국은 이 결승전에서 중동의 강호, 신흥 강자로 떠오르던 사우디 아라비아를 만났습니다 많은 사람이 (단독 우승을) 바랬죠 홈에서 하고 ‘우리도 단독 우승을 하자’ 단지 이제 우리는 7만명 정도 되는 관중이 우리를 또 응원하고 있고 그곳에서 86년 월드컵 최종 예선 일본과 시합할 때 많은 응원을 받으며서 승리했던 기억도 나고 오히려 결승전은 이전 경기보다 부담 없이 치렀던 것 같아요 사실 이 외에도 많은 메달을 따낸 종목들이 있습니다 김광선, 백현만 선수 등이 활약했던 복싱은 12체급을 전부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고 태권도는 그때 처음으로 정식 종목에 채택되었는데, 8체급 중 메달 하나를 빼고 7체급에서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그리고 유도에서는 김재엽, 안병근 같은 슈퍼스타들이 등장하면서 금메달 8개 중 6개를 가져오면서 종주국 일본을 압도하는 이변도 일으켰습니다 남녀 하키 종목에서도 세계 최강팀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장훈씨 여기서 돌발 퀴즈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86 아시안게임 당시에 우리나라는 종합 2위를 했습니다 그때 혹시 대한민국이 몇 개의 금메달을 받았는지 (아시나요?) 엄청나게 많이 딴 걸로 기억되고 그래서 (그 당시) 어린 마음에 ‘이렇게까지 (금메달을) 많이 따도 되나?' 그랬는데 100개 정도 따지 않았을까요? 근사치에요. 100개까지 예상할 줄 몰랐는데 (금메달 개수는) 93개였습니다 그때 중국에 이어서 중국이 종합 1위를 하고 대한민국이 종합 2위를 했습니다 금, 은, 동 메달을 합친 총 메달 개수에서는 대한민국이 중국보다 두 개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오늘 이렇게 다시 보니까 당시 열심히 해주셨던 우리 선수들 우리 선배 선수님들이 굉장히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86 아시안게임은 단순한 스포츠 대회가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높였고, 88 서울올림픽으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다음 에피소드에서는 88 서울올림픽의 감동적인 순간들을 함께 나눠보겠습니다 많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저희는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